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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소설과 수필

숨결이 바람 될 때(폴 칼라니티)

by 소랑나무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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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폴 칼라니티)


평소 교양서적을 주로 읽는 편이다. 무엇인가 확실한 것 같고, 삶에 도움이 되는 것 같고, 지식이 쌓이는 것 같아서.
그런데 이런 류의 책을 계속 읽다 보면 일종의 압박감과 부담감이 생긴다. 더 알아야 할 것 같고 틀리면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딱히 뭘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ㅎㅎ

서서히 휴식이 필요할 때쯤이면 감정을 자극하거나 부담 없이 마음의 평온함을 주는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 당이 떨어질 때 초콜릿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평소 보지도 않는 멜로 영화를 본다거나 눈물샘을 건드리는 노래를 듣는다거나.

소설과 수필(에세이)을 다소 멀리 했던 나는 최근에 책을 읽는 과정에서 미소를 짓거나 눈물이 고여 있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됐는데 '이래서 문학, 문학 하는구나'를 깨닫게 해 준 그 장본인이 바로 이 책이다. 물론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은 제목에서 이미 나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라니. 제목만 가지고도 많은 생각과 동시에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우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끊김이 없이 처음부터 저자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끝까지 쭉 읽어보자.
그리고 느껴 보자. 중간 중간 끊어 읽기에는 감정적으로 너무 아까운 책이다.


책의 저자인 '폴 칼라니티'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 생물학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과 의학의 역사 및 철학 과정을 공부하고 예일 의과 대학원에 진학해 의사의 길을 걸었다. 스탠퍼드 대학 병원 신경외과 레지던트 생활을 하며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미국 신경외과 학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연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펼쳐질 무렵 그에게 암이 찾아온다. 36살의 나이에 자신의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치명적인 뇌출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낮은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시력 손상을 감수해야 한다면?
발작을 멈추려고 하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다면?
당신의 아이가 얼마만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게 될까?

저자는 신경외과에서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는 동안 정체성이라는 문제에 끊임 없이 직면하게 된다.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저자는 본인이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냉동실에 30분 정도 넣어두니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족이 사망한 환자에게 작별인사를 건넬 때 나는 이에 낀 초콜릿 칩을 떼어내며 굉장히 맛있다고 생각했다. 의사로 지낸 짧은 시간 동안 도덕적으로 나아지기는커녕 퇴보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로 있으면서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솔직하게 풀어내고 성찰하는 모습이 책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산모에게 그녀의 갓난아이가 무뇌아여서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알린 후 차를 몰고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동료 의사 제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삶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수년을 죽음과 함께 보낸 후 저자는 편안한 죽음이 반드시 최고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아기를 갖기로 결정하면서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죽어가는 대신 살아간다니. 가슴이 아프면서도 먹먹한 감동을 느꼈다.

딸 케이디가 태어난 후 8개월. 그는 딸이 태어난 분만 병동에서 2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그곳. 병원 침대에서 숨을 거뒀다. 비록 책을 다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완성된 책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에 나오는 아내 루시 칼라니티가 쓴 에필로그 또한 감동적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 갓 태어난 아기. 남아 있는 가족. 이들 앞에서 난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젊은 의사의 간절한 고백록과 함께 삶의 의미, 사랑,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꼭 읽어 보시길 추천드린다.

끝으로 딸 '케이디'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 정도까지만 살기를 원했던 '폴 칼라니티'가 딸에게 남긴 메모를 소개하며 마치겠다. 그는 끝내 이 부분까지만 글을 쓸 수 있었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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