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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소설과 수필

밝은 밤(최은영)

by 소랑나무 2022.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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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최은영)

 

최은영 작가님: 2013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제5회, 8회, 11회 젊은 작가상을 수상).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짧은 소설 「애쓰지 않아도」가 있다.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이해조 소설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다양한 수상을 하였다. 구매한 책 표지에 작가님 사진이 있어서 올렸는데 역시나 젊은 작가님이시다. 한국 문학의 미래는 밝다^^

 

 


증조할머니(삼천이), 할머니(영옥), 엄마(미선), 나(지연). 시간상으로는 100여 년을 아우르며 사랑, 차별, 질투, 삶과 죽음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300쪽이 넘는 두께를 자랑하지만 실제 읽는 시간은 장편 소설이 무색할 정도로 술술 익힌다. 흡입력이 그만큼 대단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초반에 다소 진부해진 소재를 다루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럴 때면 삼천이 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가 구세주처럼 등장해 우리를 구원해(?) 준다. 삼천이와 새비가 글자를 익혀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다.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 지연의 회상으로 전개가 된다. 열 살 때 처음 희령을 가게 되었고 그 뒤 서른 두 살이 되어서야 이혼을 한 채 다시 그곳에 내려가게 된다. 희령 천문대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우연히 할머니(영옥)와 재회하였고 할머니에게 증조할머니(삼천이)와 관련한 얘기를 듣는다.

증조할머니 삼천이는 백정의 딸로(당시 개나 말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함) 온갖 멸시를 받으며 병든 어머니를 대신해 역 주변에서 돈을 벌다가 천주교 신자인 증조부를 만나 개성으로 가게 된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낯선 남자와 함께 개성으로 떠나 새 삶을 살고자 하는 딸에게 병든 어머니가 떠나라고 말한다. 떠나지 않으면 어머니의 수발을 들다 일본 군인에게 끌려가 몹쓸 짓을 당할 수 있고, 떠나자니 어머니를 버리고 간 딸이 된다. 다음 생에선 딸로 태어나 어머니로서 못해준 사랑을 하겠다는 어머니의 마음과 평생 멍울을 안고 가야 하는 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개성에 가서도 백정의 딸이라는 그물 속에 갇혀 살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 항일의 언행도 아니고 같은 조선인들끼리 백정의 딸이라고 무시하고 천대하는 상황에서 너무 화가 났다. 실제도 그랬겠지? 어릴 때 특정 성을 지칭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한 성씨라 비하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새비아저씨가 중얼거렸다. 영옥이 너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조선인, 일본인의 문제일까?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일까? 얼마 전 임장을 갔던 모 뉴타운에서 같은 아파트인데 입구가 다르길래 부동산 아주머니께 여쭈어보니 저쪽은 임대아파트 입구라고 한다. 

 

희자 아바이가 히로시마에서 죽었다면 내가 무얼 빌었을까 생각해보면 말이야…고저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십 분이라도 희자 아바이를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안아보는 거, 내 기걸 원했을 것 같아. 한 시간, 한 순간에 비한다면 이 몇 년은 참으루 긴 시간 아니갔어. 희자 아바이가 어떤 모습이어두 내 곁에 있잖아.

삼천이와 새비가 주고받던 편지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러 일본에 간 새비아저씨는 히로시마 원폭에 의해 병을 얻게 된다. 새비아저씨가 히로시마에서 죽게 되었다면 귀국해서 고통스럽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서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 짧은 시간이라도 함께 하며 마지막을 보내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런 모습을 보지 않고 기억 속에서 보내 주는 게 좋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힘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너무나도 괴로울 거 같다.

 

남자 마음 하나 잡지를 못해서 빼앗겼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증조부)
한번 더 그런 말 했다가는 당신 내 손에 죽습니다.(삼천)
아바이, 죽어버려요. 우리 눈에 띄지 말고 죽어버리란 말입니다. 당신 돌아가셔도 내레 흘릴 눈물은 없습니다. 아바이 산소에도 걸음하지 않을 거고, 내는 아바이를 잊을 겁니다. 기러니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우리 없는 곳에서 죽으란 말입니다.(영옥)

가장 통쾌했던 순간이다. 삼천이도 영옥이도 드디어 할 말을 여과없이 하게 되었다. 결혼한 사람과 자식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딸과 중혼을 시키는 아버지가 할 소리인가. 이 소설에서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 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남자(남편)들이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다. 무시, 차별, 외도 등 어떻게 4대에 걸친 남자들이 다 저 모양인지 씁쓸하다. 남편들의 좋지 않은 모습과 더불어 주요 여성 인물들의 평소 생활 태도나 대처 모습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 이혼 전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더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했다. 잘 사는 것이 복수라고, 보란 듯이 잘 살면 된다고 말하는 응원의 목소리가 내 등을 천천히 두드리는 손길에서 내 등을 후려치는 채찍이 되는 동안에.
  • 난 다 피했어,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게 됐어.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텅 비어서 아무 느낌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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